무려 800년 전 베트남 최초의 왕조인 Ly(리) 왕조의 후손들이 한국에 살고 있다. 2022년 이 기사를 접했을 때, 나는 뜬금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베트남은 비행기를 타고 가도 5시간의 거리에 실제 3.600km라고 한다. 무슨 일이 있었기에 베트남 왕조의 후손들이 한국에 왔을까? 궁금했다. 이제부터 알아보도록 하자.
베트남 리왕조의 마지막 역사
리(Ly) 왕조는 베트남 최초의 국가로 지금의 하노이를 중심으로 활동했던 국가이다. 1009년 태조(Ly cong uan) '리 꽁 우언'을 시작으로 9대에 걸쳐 무려 217년 동안 베트남을 장기 집권한 왕조이다. Ly왕조가 멸망한 이유는 다른 나라와 별반 다를 것은 없다. 7대 왕 고종이 즉위하고 그의 부패와 사치가 심해지면서 전국적으로 반란이 일어났는데, 부패한 왕조가 늘 그렇듯이 반란을 잠재울 힘이 없었다. 반란군이 왕실에 침입하자 7대 왕 고종의 아들인 '리삼'은 반란군을 피해 Tran(전) 가문으로 몸을 피했는데, Tran가문은 홍강 델타지역의 대표적인 호족이었다. '리삼'은 Tran(전) 가문의 도움으로 반란을 잠재우고 이를 대가로 '리삼'은 Tran 집안의 딸과 결혼을 하게 된다. 이때 7대 왕 고종이 병사하자 '리삼'이 왕이 되는데, Ly왕조의 8대 왕 혜종이며 그때 혜종의 나이 16세였다. 이에 Tran가문은 권력을 얻게 되고 혜종을 휘두르게 된다. 혜종은 슬하에 딸 두 명을 낳았는데, Tran(전) 가문의 압력에 못 이겨 큰 딸은 Tran가문의 권력자의 조카와 결혼을 했고, 이는 혜종입장에서 아내도 Tran 가문, 사위도 Tran가문인 상황이 된 것이다. 혜종은 태생부터 병약했고 정신병이 있었는데, 이에 심각성을 느끼고 일찍 왕위를 넘기기로 결정한다. 하지만 태종에게 아들은 없었고 Tran가문에 시집을 간 큰 딸에게 왕위를 물려주기에는 Tran 가문의 힘을 더욱 키워주는 일이 되었다. 이에 혜종은 둘째 딸 '리 팟 낌'에게 왕위를 물려주는데, '리 팟 낌'은 Ly왕조의 9대 왕이 되었고 '소황'이라고 칭해지며 Ly왕조의 마지막 왕이 되었다. 이때 소황의 나이는 6살이었다. 소황은 왕이 되고 얼마 되지 않아 Tran가문의 권력자 '진수도'의 조카와 결혼을 하게 되고, '소황'은 왕이 되자마자, Tran가문의 계략으로 남편에게 왕위를 넘기며 Ly왕조의 시대는 1225년을 마지막으로 끝이 나게 되며, 이는 Tran왕조의 시작이 되었다.
베트남 마지막 왕자 리 롱 뜨엉
1226년, 새로운 왕조를 건설한 Tran가문의 Ly가문의 말살이 시작된다. Tran 왕조의 지배구조는 홍강 델타 일대만을 지배하고 그 주변은 지방 호족들에 의해 통치되는 형식이었기 때문에 Ly가문이 언제 힘을 키워 복귀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쌓여있었고 이는 Ly가문의 말살로 이어진다. 많은 Ly가문의 왕족들이 처형당했고 이에 Ly왕족들은 급하게 도망을 가게 된다. 이때 Ly왕조의 6대왕 영종의 아들 '리 롱 뜨엉'도 급하게 배를 구해 자신의 일족들과 함께 송나라로 도망을 치게 된다. 하지만 배는 송나라로 가지 못하고 계절풍을 타고 떠돌게 되는데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곳이 한반도였다. 리 롱 뜨엉에 대해 간단히 설명하면 6대 왕의 아들로 매우 능력 있는 왕자였다고 한다. 만약 8대 왕 혜종이 '소황'이 아닌 '리 롱 뜨엉'에게 왕위를 물려줬다면 역사는 바뀌었을 거라고 베트남 역사학자들의 말할 정도로 유능했다고 한다. 어찌됐건 우여곡절 끝에 한반도에 도착한 그는 한반도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된다.
화산이씨의 시조 이용상
당시 한반도는 고려가 지배하고 있었고 왕은 고종(1213년 ~ 1259년)이었다. 한반도에 정착한 '리 똥 뜨엉'과 그의 일족들은 옹진군 마산면 화산리에 정착했는데, 단순히 정착만 한 것이 아니라 몽골이 침략했을 때도 그의 일족들과 당당히 맞서 싸워 몽골을 무찔렀고 이에 고려조정은 '리 롱 뜨엉'을 화산군으로 봉하고 일대의 땅을 하사하고 정착을 도왔다. 이러한 과정에서 '리 롱 뜨엉'은 화산을 본관으로 삼고 '이용상'이 되고 화산이씨의 시조가 된다. 그는 고려의 여인과 결혼하고 고려에서 살게 되는데 평생 고국을 그리워했다고 한다.
화산이씨 후손들과 베트남
1995년, Ly왕조의 후손들이 한국에 살아있다는 소식이 베트남에 전해진다. 이는 베트남에서도 큰 화제가 되었다. 1995년화산이씨 종친 간부들이 베트남에 방문했는데, 당시 서기장부터 시작해 많은 간부들이 모두 나와 국빈급으로 환대를 해주었고, 베트남은 화산이 씨가 베트남 'Ly왕조의 후손들이라는 사실을 공식 인정하게 된다. 화산이 씨와 베트남의 관계는 아직까지도 활발히 이어지고 있다. 화산이 씨 28대손 이창근씨는 베트남 최초의 이중국적자이며, 2017년부터 주한 베트남 관광대사를 하고 있다. 화산 이 씨 종친회는 베트남과 한국과의 관계에서 문화,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화산이 씨는 현재 베트남에서 자국민과 같은 법을 적용받고, 같은 대우를 받고 있다. Ly왕조의 멸망하는 과정만을 적어서 별거 아닌 왕조라고 생각하는데 Ly왕조는 베트남의 기반을 다졌고, 송나라의 침략을 물리쳤으며 , 베트남 역사상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중국땅으로 진격을 개시한 마지막 국가이며 베트남 사람들은 Ly왕조를 아주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정선이씨의 후손들
이용상이 1226년에 한반도로 넘어와서 화산이씨의 시조가 되었다면, 이양혼은 무려 100여 년 전 1127년에 한반도로 넘어왔다. 이양혼은 Ly왕조의 전성기를 이끈 4대 왕 인종의 둘째 아들로, 5대 왕 신종의 동생이다. 이양혼은 왕위계승에서 패해 송나라로 가게 되는데 송나라에서 나름 지위도 받고 잘 지냈으나, 금나라가 송나라를 침공해 오자 이를 피하고자 1127년 고려로 건너와서 경주에 정착했고, 정선이씨의 시조가 되었다. 하지만 정선이씨세보와 베트남의 대월사기전서의 기록과 맞지 않아서 역사학적으로 신뢰를 얻지 못했다. 하지만 베트남은 정선이씨 또한 Ly왕조의 후손으로 인정했으며 화산이씨와 동일한 대우를 해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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